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면서 지소미아에 대한 폐기에 대한 찬반양론이 격화된 가운데 한일협정에 대한 재해석이 분쟁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이번 갈등의 쟁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국가 간 외교권 보호가 피해자 개인의 인권 보호를 갈음할 수 없으며 또한 국가발전을 위한 산업체 지원이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을 갈음할 수 없다는 인권의식이다. 한일협정을 준수하기 위한 한일각료회의는 개발도상국 시기에 이뤄졌으며 그러한 시기에 이뤄진 한일각료회의는 개인의 발전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우선시했고 개인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권의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강제징용 및 위안부 배상금으로 사용되어야 할 한일협정의 자금이 국가기간산업 발전을 위한 산업체 건설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인권의식이 신장된 지금으로서는 용인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있다. 일본 내부에서도 원폭 피해자 배상과 관련 피해자 개인에 대한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국민에 대한 보호에 있어서는 국가 간 외교권 보호가 개인의 청구권을 갈음할 수 없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한국국민에 대한 피해보상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인류보편의 인권에 있어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을 차별하는 일본정부의 이중잣대가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부분이다.
한국과 일본관계에서의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의 적반하장식 태도에 밀려나지 않고 한국정부를 비난하면서 내리누르는 일본정부에 맞서서 한국국민 보호의 책임을 다하고 일본제국주의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한 한국정부의 이러한 노력에 대해 국제사회가 인본주의 차원에서 공감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풀리지 않는 갈등에 대한 뜨거운 논란 다시 시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한국인 원폭 피폭자에 대해 한국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분쟁해결 절차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한 2011년 헌법재판소결정, 강제동원피해자의 일본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를 기각한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해서 환송한 2012년 대법원 판결, 그리고 기업의 상고를 다시 기각해서 강제동원피해자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한 고등법원 판결을 확정한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 등에 대해 한국과 일본에서는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의 아베 총리는 "국제법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결정", 고노 외무장관은 "양국 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 스가 관방장관은 "조약은 사법기관도 구속한다" 등 비난해서 대부분의 언론과 '지식인'들도 이에 추종해서 한국은 국가 간의 합의를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이와 관련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74주년 희생자 위령식에서 "한국이 한일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한국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이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일본 현지에서 한국 대법원의 징용배상판결과 관련, 일본의 일부 변호사들이 일본정부의 대응을 비판한 바 있다. 가와카미 시로 변호사,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도쿄 지요다 구에 있는 참의원회관 회의실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변호사들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그 취지를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피해자와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국가 간 합의는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한 개인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며 "개인의 배상청구권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아베 총리의 설명은 오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변호사들은 성명에서 2007년 중국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가 "재판상 권리가 상실됐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도 "청구권이 소멸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점과 일본 정부 측이 1991년 유사한 입장을 밝혔던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또 "신일철주금이 판결을 수용함과 동시에 자발적으로 인권침해 사실과 책임을 인정, 그 증거로서 사죄와 배상을 포함해 피해자와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일협력위원회와 한일각료회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지난해 강제징용 및 위안부 배상판결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뜨거운 논란 속에 와타나베 히데오 일한 협력위원회 대표가 이낙연 국무총리를 접견하기 위해 방한했다. 한일협력위원회는 지난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한일 두 나라는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가 필요하다고 인식에서 출범했다. 1968년 11월 13일 기시 노부스케가 서울을 방문해 김성곤, 장기영 등 한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 준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기구 설립을 추진했고 그 결과 1969년 2월 12일에서 15일까지 도쿄에서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창립총회 겸 제1회 합동위원회에 한국 측 백두진(전 국무총리), 일본 측 기시 노부스케(전 수상)가 두 나라의 회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한일협력위원회는 ▲일본의 대한 인식, 한국의 대일 인식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교류를 촉진한다 ▲한일 양국이 월남문제에 관해 적극 협력한다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가 아시아에서 긴밀히 협력한다 ▲재일교포의 지위 향상을 위해 양국은 계속 노력한다 ▲한일 간의 무역 불균형 시정과 한일경제협력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노력한다 ▲문화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유학생의 교환, TV프로 교환, 문학작품의 상호 번역 출판, 언론인의 상호 방문, 과학기술의 정보 교환, 과학기술자의 공동연구, 숙련기술자의 교류를 촉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창립 직후 제1차 합동상임위원회가 1969년 5월 20일부 한일경제협력문제 등 총회 때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토의했다. 이어 제2차 합동상임위원회가 같은 해 11월 27일부터 28일까지 이틀간 서울에서 열려 오키나와 반환에 따른 극동안보문제,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지원문제, 재일교포의 영주권·경제활동·교육문제, 한일무역불균형문제 등 양국의 정치·경제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협의했다.
한일협력위원회에 앞서 지난 1967년 한일각료회담이 개최됐다. 당시 한국과 일본은 한일협정의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무교섭을 진행해 나갔는데 한국 정부는 경제개발 추진을 위한 자금 마련이 중요한 사안이었으므로 청구권 자금 조기 실시와 협정 한도액 증액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청구권 자금 교섭은 정부의 기대보다 크게 못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6년 개최된 한일경제각료간담회에서도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자 한국과 일본은 한일경제각료회담을 확대 발전시켜 한일각료회담을 개최하는 것에 합의했다. 한일각료회담은 1967년 3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과 일본 수상 사토 에이사쿠 사이에 개최된 정-사토 회담에서 결정됐으며 이 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경제협력 촉진 ▲월남문제를 포함한 중공 및 아시아 정세 ▲사토 수상의 방한문제 등을 논의했다.
제1차 회담은 8월 9~11일 사흘 동안 도쿄에서 개최되었으며 한국 측 대표단장은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었고, 일본 측은 외상 미키다케오였다. 제1차 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은 ▲신규 2억 달러 차관 ▲어업협력 및 선박자금 ▲한일무역합동위원회 설치 ▲가공무역 ▲재한 일본상사 문제 ▲어업문제 등으로 극히 한정된 부문에서 이뤄졌다. 이 회담에 대해 신민당은 부대변인을 통해 “2억 달러 상업차관을 일본으로부터 구걸한 굴욕적 회담”이라고 비판했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일본차관에 크게 의존한 것은 한국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는 중대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2차 회담은 1968년 8월 27일부터 29까지 사흘간 서울에서 열렸으며 한국 측 수석대표는 경제기획원 장관 박충훈이었고, 일본 측 수석대표는 미키 다케오였다. 회담 결과, ▲일본의 대한 직접 및 합작투자 승인 ▲보세가공 수출의 면세제도 확립 ▲1차산품의 개발과 한일교류의 촉진 ▲조세협정의 조속한 체결 등 현안문제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1969년 8월 26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각료회담에서 한국 정부는 종합제철 공장건설을 위한 자금지원 약속을 받아내는 것을 목표로 회담에 임했지만 제철소 건설 사업에 대한 청구권 자금의 전용은 법률에서 정한 자금 사용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종합제철 공장을 건설한다는 기본 방침에 합의하고, 조사단을 파견해 계획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한일협정에서의 청구권 자금은 피해자 개인과 그 가족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포항제철공장 건설비용으로 사용한다는 데에 한국과 일본 양국이 합의하게 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 해결 실마리 찾을 수 있나
한일협정의 청구권을 두고 한국과 일본이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한일협정의 청구권은 외교보호권으로서 정치적인 선언에 불과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본의 변호사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한국과 일본 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난해 일본에서 한국의 대법원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한 바 있는 일본 변호사 야마모토 세이타는 “한일 양국의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의 변천”이라는 글에서 한일협정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해석의 차이는 크지 않아 한일청구권협정이 전쟁·식민지 피해자 권리 회복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야마모토 세이타는 “한일청구권협정은 일종의 정치적 선전에 불과하다”며 한일청구권협정(1965) 이전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 일소 공동 선언(1956)에도 한일청구권협정과 유사한 청구권 포기 조항이 있었으며 이들 조항으로 상대국(미국, 소련)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해서, 일본인 원폭 피해자와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이 일본국을 상대로 보상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피고 일본국은 "조약으로 포기된 것은 일본정부의 외교보호권이며 개인(일본인 피폭자, 억류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국은 보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시에도 일본 외교부 당국자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이란 외교보호권 포기를 의미할 뿐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했으며 지난 1990년대 초 국회에서 야당의 추궁 끝에 일본정부는 한국인 피해자에 관해서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포기된 것은 외교보호권일 뿐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2000년경 전후보상(배상) 재판에서 "시효"나 "국가무답책(国家無答責)" 등의 쟁점에 대해 일본정부에 불리한 판단이 나오게 되자 일본정부는 갑자기 주장을 뒤집어 전후보상(배상) 문제는 청구권 포기 조항으로 해결 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정부는 지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이후 이 협정으로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불리한 견해를 취했다. 그 후 일본정부가 외교 보호권 포기설에 입각하는 것이 알려지게 되자, 지난 2000년 외교통상부 장관은 청구권 협정으로 포기된 것은 외교 보호권일 뿐,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지난 2004년 민관공동위원회 견해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군·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어" "사할린 동포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2012년 대법원 판결은 "반인도적 불법 행위나 식민 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 배상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이 아니라 외교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강제동원 노동자 문제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야마모토 세이타는 위와 같이 한일 양국의 한일청구권협정 해석은 현저히 변천해 왔으며 한국과 일본이 한일협정의 해석에 대해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실체적 권리)이 소멸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치했다고 결론지었다. 야마모토 세이타는 지난 2015년 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일 양국정부가 합의해 이 문제는 "최종적 및 비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성명이 발표됐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실체적 권리)이 이러한 정부 간 행정 협정으로 소멸되는 것은 있을 리가 없어, "최종적 및 비가역적으로 해결"이란 한국정부의 외교 보호권 포기를 의미하는 데 불과한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