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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정치

4·15총선, 야당 심판, 여당 심판도 아니었다. ‘이념 심판’이었다

4·15총선, 야당 심판, 여당 심판도 아니었다. ‘이념 심판’이었다

 

 

총선이 끝난 뒤, 달라진 민심을 진단하는 뉴스와 토론이 쏟아졌다. 분석도 매우 다양했다. 지역갈등이 깊어졌다는지, 혹은 ‘민주당이 이긴 선거가 아닌 통합당이 진 선거’라는 말도 나왔다. 또 50대 유권자의 지형 변화가 결정적이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차명진 막말이 결정적인 참패요인이었다’는 진단도 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이념에 대한 심판’, 혹은 ‘이념의 종말’이었다. 과거부터 우리 사회의 정치권을 장악했던 ‘사회주의’, ‘좌파’, ‘빨갱이’라는 이념의 대립각이 무너지고 ‘건강하고 합리적인 상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이미 다수의 국민은 ‘건강하고 합리적인 상식’으로 판단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합당은 철 지난 이념을 내세우면서 결국 국민의 외면을 받았다는 이야기다.

 

통합당, 염불외듯 이념 색깔의 메시지만 난무
총선 결과를 표시한 우리나라 지도만 보면 영호남의 대립 구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지역감정이 격화됐다’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과거보다 지역감정이 더 심화했다는 진단이다. 하지만 그렇게만 설명하기에 ‘여당 180석’은 너무도 압도적인 표 차이다. 정의당으로 인해 표가 분산되지 않았다면, 범여권이 200석도 충분히 넘길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는 지역감정이 심화했다기보다 국민 전반이 진보의 길을 택했고, 그렇지 않은 남은 지역이 고립되었을 뿐이다.


이번 선거에는 애초에 ‘정권심판 vs 야당심판’이라는 프레임이 등장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이 프레임도 작동하지 않았다. 국민은 야당을 심판했다기보다 현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줄 필요를 느꼈을 뿐이다. 거기에다 이제 국민은 과거의 이념 색깔이 짙은 구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김종인 위원장이 통합당의 선거를 총책임지면서 했던 첫 일성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지금의 20~30대는 교과서에서나 들은 ‘오래된 과거의 정치구호’였다. 피부에 느껴질 리 만무했다. 거기다가 황교안 후보를 비롯해 많은 통합당 후보들은 유세를 하면서 ‘나라가 망한다’, ‘문재인은 좌파독재이다’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다수의 국민에게는 생뚱맞은 말이었다. 


이미 우리나라는 세계 10위를 오가는 경제 대국이고, 마침 코로나19의 정부 대응이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뭐가 독재고, 뭐가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있는데 전 세계 20여 개국 정상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해 도와달라고 할까? 나라가 독재인데 세계적인 언론사인 BBC와 CNN이 우리나라의 모범적인 방역을 칭찬할까? 통합당의 메시지는 ‘딴 나라 세상’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국민은 깨어나고 높은 정치의식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통합당은 여전히 과거의 정치 문법만 염불 외우 듯 속삭일 뿐이었다. 더구나 지금의 국민은 촛불혁명을 거쳤고, 조국 사태를 거친 사람들이다. 정치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때로 정치 평론가보다 더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국민에게 ‘통합당을 찍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처음부터 도저히 먹힐 수 없는 황당한 메시지에 불과했다.

 

궤멸의 마지막 신호?
이미 국민의 판단기준은 그런 이념이 아닌 ‘정의로움과 민주주의’라는 기준으로 이동했다. 그런 국민에게 이념 공세를 통해서 선거에 이기겠다는 방향성 자체가 이미 ‘조준 미스’였다고 볼 수 있다.
또 지난해 연말부터 선거 전까지 이뤄진 선거의 방식 역시 이념을 탈피하지 못했다. 과거 군사독재 때나 써먹던 삭발, 단식이 이어졌다. 통합당 의원들이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폭력사태를 만든 것도 과거 이념정치가 지배하던 방식의 투쟁이었다. 촛불혁명을 진행하면서 길거리에 쓰레기조차 남기지 않고, 경찰과 단 한 번의 충돌도 없었던 국민이 보기에 통합당이 보여주었던 행태는 국민보다 덜 떨어진 모습이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통합당을 ‘보수’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보수는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고 ‘정말로 나라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들’이다. 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진심어린 지향성, 국가의 안위를 보살피려는 깊은 마음이 바로 보수의 품격이다. 거기다가 정제된 언어와 국격을 높이는 태도는 당연히 ‘존경해야 할 보수의 본령’이다. 하지만 국민이 본 통합당은 그런 보수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만 지키려는 ‘수구 세력’에 불과했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막말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의심하게 했고, 온 국민이 눈물 흘렸던 세월호에 대한 막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니 당연히 그들에게는 정체성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는 동물적 본능만 있을 뿐,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명확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통합당 이준석 후보는 한 언론에 이렇게까지 말했다. 


“반(反)문재인’이 어떻게 한 정당의 정체성이 될 수 있나. 통합당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통합당을 찍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정체성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곧,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국민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막강한 권력을 지닌 국회의원으로 보내지 않는다. 
이번 선거는 ‘세대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통합당 인사들의 ‘낡은 인식’으로는 이제 국민에서 표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즉, 아직도 박정희와 박근혜 시대를 ‘영광와 발전의 시대’로 알고 있는 세대는 지금의 변화된 정치 지형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통합당 일각에서도 ‘당을 해체하고 40대의 인물이 당의 중심에 서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지금 통합당이 김종인 전 총괄선대위원장을 다시 비대위원장으로 영입하려는 움직임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자유한국당을 향해 충격적인 내부 비판을 했던 김세연 의원은 “현실 인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게(총선 패배의) 끝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자칫 하다가는 이제 수구의 이름을 쓴 보수는 완전히 퇴출될 수도 있으며, 지금의 100석 안팎의 의석수는 그 몰락의 마지막 징조라는 이야기다. 
민주주의에는 건강한 야당, 합리적 보수는 늘 존재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에서는 점차 그 야당과 보수가 궤멸되어 가고 있는 형세가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와 여당에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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