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명장 서울가발박사 장만우 원장

 TV를 보면 노래 연기 등 연예계의 각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뽐내는 신동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남보다 한발 먼저 노력해야 성공한다는 부모들의 열정이 아이들을 그리 만들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 일찍부터 남다른 혜안을 통해 스스로 블루오션을 개척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울가발박사의 장만우 원장이다. 가발계의 신동이었던 그는 이제 고객들로부터 박사로 인정받아 자체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無에서 毛를 창조한 장 원장의 박사 이야기는 시작됐다.

대한민국명장의 타이틀을 가진 서울가발박사의 장만우 원장은 현재 전국적으로 서울·대전·진주·전주·구미·부산에서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두 아들(장지혁, 장대혁)과 함께 이 땅의 탈모인들을 위한 미용업에 종사하고 있다. 장 원장이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중고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사정도 별다른 것 없었기에 학업을 이어 나가긴 어려웠다. 그렇게 일찍 사회로 나와야만 했던 장 원장은 ‘열심히 노력해서 집안에 도움이 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루자’라고 마음을 다잡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 자리에 있게 됐다. 머리숱이 적어 근심하는 상황이라면 서울가발박사 장만우 원장에게 의뢰해보자.

 

성공 비결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조기 사회 진출?

어린 나이에 자칫 비뚤어질 수도 있었지만, 장 원장은 떡잎부터 달랐다. 아마도 집안을 살리겠다는, 그래서 못다 한 학업을 이루겠다는 오기와 끈기가 오늘의 그를 만든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장 원장은 말한다.

그렇게 집(충남 청양)에서 일구던 구기자 농사를 돕고 있을 때였다. 한 달에 두 번, 장이 서는 날에는 그곳에서 운영하는 미용실에 놀러 갔다고 한다. 새로운 것 없는 광경이었지만, 어린 장 원장은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파마하는 모습이 문득 신기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자연스럽게 들어가 구경하고 있는데 미용실 원장이 “이건 여자의 고유 직업이니 집으로 돌아가라”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치지 않고 와서 구경하는 그를 본 미용실 원장은 대전에 학원이 있으니 가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부푼 마음으로 학원에 간 그에게 돌아온 답은 “남자는 안 된다, 정 배우고 싶으면 학원비를 일시금으로 내라”였다. 돈이 없어 포기할 줄 알았던 학원장에게 장 원장은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 주신 돈을 보란 듯이 내밀었고, 극적으로 미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수강생 모두 여자인 속에서 장만우 원장 혼자만 남자인 상황. 한 번은 연탄불에 고대를 달구어 머리를 구부리는 기술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지금은 가발 쓴 마네킹에 연습하지만 그땐 없어서 연습생끼리 서로 머리 모델을 해줘야 했다. 그렇게 연습을 하기도 하고 연습 상대가 되어주기도 하며 머리가 수세미가 되었던 일을 회상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미용면허자격시험을 보러 갔는데 남자가 하고 있으니까 신기하게 생각됐는지 감독관이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어쩌면 당시엔 그것이 당연한 상황이었을 지도 모른다. 장 원장은 ‘왜 남자가 미용을 배우냐고 물어보겠지?’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예상 밖에 감독관은 “남자가 드문 미용업계에서 열심히 하면 앞으로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지금까지도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장 원장은 떠올렸다. 미용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장 원장은 시험 감독관의 소개로 충북 이·미용 지부장에게 스카우트됐고, 이발도 배우게 됐다.

흔히들 “남자가 왜 여자가 하는 일을 하려고 하느냐”라며 무심코 묻고 하는데 여자가 주로 하는 일을 고집했던 것은 미용을 죽어도 꼭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당시 미용실은 대한민국 어디서나 호황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배움에 대한 미련과 가정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뜻이 더해져 미용학원을 등록하게 됐고, 집에는 중장비학원에 다닌다는 꾀를 썼다고 한다. 

▲ 서울가발박사 장만우 원장과 두 아들(장지혁, 장대혁)(사진=데일리뉴스 DB)
▲ 서울가발박사 장만우 원장과 두 아들(장지혁, 장대혁)(사진=데일리뉴스 DB)

전문가의 길,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앞당겨

장 원장이 미용에서 가발 쪽으로 분야를 확장하게 된 건 20대 초반, 그에게 탈모다 오기 시작하고부터이다. 가발이 장래성이 있겠다 싶었는데 동네에는 관련 학원도 없었고 연습해 볼 사람도 없어서 논산에서 대전으로 배우러 다녔다고 한다. 미용 재료상에서 배웠는데 큰돈을 들여야 했지만, 미래성을 생각하며 커트치고 모양 만드는 가발의 핵심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때 이발을 배웠던 것이 도움이 됐고 연습을 많이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겼다고 한다. 그렇게 대전에서 가발업을 시작하게 됐다. 

논산교육대, 이용업계 쪽으로 경차를 끌고 다니며 광고했는데 장 원장과 같은 탈모의 고민을 겪고 있던 손님이 어찌나 많던지. 보름은 집에서 보름은 차에서 자고 다닐 만큼 바빴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가발업은 불모지였는데 열심히 하다 보니 계약 건수가 밀릴 정도였는데 벌써 35년 전 얘기라고 한다.

그렇게 대전에서 가발사업의 시장성을 보고 영역을 넓혀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는 장 원장.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 지하철은 1호선만 있었다고 한다. 길이는 10칸. 한 칸에 탈모인이 10명 정도 있다고 치면 지하철이 10칸이니 한 번 타면 100명에게 홍보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명함을 돌렸다고 한다. 당시 차에 간판 사진 명함사진을 붙이고 다니며 LED 간판 등을 활용해 홍보를 했는데 이런 형태의 차 광고는 자신이 원조 격이라 단언하는 장 원장이다. 

▲ 서울가발박사 외부(사진=데일리뉴스 DB)
▲ 서울가발박사 외부(사진=데일리뉴스 DB)

가발박사란 별칭이 어색하지 않게 된 비결

장만우 원장은 “가발이라는 분야는 연구도 많이 해야 하고 내가 소비자라는 생각으로 임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장사꾼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언제든 내가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손님도 만족하게 된다고 한다. 길게, 멀리 보고 해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손님에게 솔직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장 원장은 쉬지 않고 연구를 많이 해서 특허도 몇 개 있다고 한다. 가발에는 대부분 똑딱 핀이나 클립이 달려 있거나 양면테이프가 붙어 있는데 국내 최초로 핀 없는 가발을 발명했다고 한다. 장 원장이 고안한 가발은 조그마한 버섯 돌기가 여러 개 박혀 있는 특수 벨크로 가발이며, 더욱 자연스러운 표현을 위해 6개월 동안 공을 들였다고 한다. “우리 가발은 모발이 잘 빠지지 않고 사용자가 착용했을 때 가렵고 아프지 않아요. 머리카락이 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장점입니다”라며, “저는 이·미용을 배웠기 때문에 만족도가 높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가발은 통풍이 잘돼야 하고 커트를 잘해줘야 하는데, 이·미용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 무면허로 가발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고객과의 신뢰를 지키는데 중요한 문제이기에 가발도 면허제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산업인력공단에 문제점을 제시했다. 그러한 장 원장은 중앙회 이사로 강사들 교육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제한적이던 가발 시장, 치료에서 미용까지 

초창기 가발 시장에는 젊은이들이 많이 없었는데, 산업발전으로 공해나 환경오염이 늘어 젊은 층에서도 탈모가 심각하고 유전성도 많아 더 이상 탈모가 중장년층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고 장 원장은 말한다. 그가 가발을 처음 배울 때만 해도 가발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보편화돼 있으니 처음 접하는 분들도 겁내지 말고 상담하라고 조언한다.

이와 함께 “우울증에 걸려 온 사람도 있고, 결혼을 못 해서 온 사람도 있고, 여성분들도 오십니다”라며, “모자를 써서 부족한 머리숱을 감추게 되면 탈모에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주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가발을 착용하면 스타일이 보완되다 보니 사회 생활하는 데도 자신감을 얻어 큰 도움이 되고 외모도 한결 나아져 노총각들이 결혼도 하는 것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는 장 원장. 고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때면 이 업계에 발을 디디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캐나다·일본에서도 소문을 듣고 왔었다며 최근 코로나 때문에 해외 진출이 정체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가발시장이 열려 있다는 증거이니 무한 가능성을 펼칠 때가 올 것이다.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고 편한 가발을 만들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탈모가 없는 사람들도 쓸 수 있는 패션 가발을 만들 수 있을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는 장 원장의 머릿속은 고객들의 행복과 가발에 대한 아이디어로 가득한 듯 느껴졌다. 

16살 때부터 시작해 68살이니 이제 50년, 반세기 동안 가발업과 성장한 인생을 회고하듯 말하는 장 원장은 이제 두 아들과 함께 가업을 이어 나가고 있어 든든하고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장원 장은 늘 초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온 가족이 열심히 노력해서 필요한 분들을 위한 좋은 가발을 만들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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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만우 대표의 고객관리 Know How >

동병상련의 기본 자세

비만이나 탈모 등 임상이 중요한 분야에서 내가 먼저 경험해 봤다는 것은 고객을 끄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하나의 무기이자 자신감일 수 있다. “나도 당신을 이해한다.”라는 기본 마인드로 진심을 다한다면 만나는 손님마다 평생고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고객을 놓치면 내가 죽는다는 비장함

절실, 절박함을 능가하는 성공 비법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고객을 놓치면 다음 고객도 없다는 절실함이 현재 고객에게 더욱더 성심을 다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無에서 毛를 창조한다는 신적 마인드

아무리 고객관리를 철저히 한다 해도 제품의 경쟁력이 없다면 무용지물. 처음에 기본 기술을 잘 연마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기술을 고객마다 적절히 잘 적용해 자신의 스타일에 만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기본 마인드다. 

한번 만난 고객은 영원한 고객

한 번도 안 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밖에 안 써본 사람은 없다는 말을 장만우 대표의 가발을 착용해 본 고객들에 적용해도 예외는 아니다. 꾸준한 고객과 제품관리에 늘 열심을 기울이는 그의 테크닉을 거쳐 간 고객이라면 다른 제품을 쓰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人프라를 적극 활용

저장하고 있는 10000여 개의 전화번호 보기를 황금같이 소중히 한다는 장만우 원장. 고객의 연락처로 AS나 1대1 관리가 가능하고 서비스에 만족한 고객의 입소문이 새로운 고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손길이 거쳐 간 고객이 자발적 영업사원이 되는 것은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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